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사카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자리를 갖춰 갔다. 1603년에 [[쇼군]]에 임명돼 [[에도 막부]]를 열면서 명실상부한 [[천하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큰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도요토미 세력과 도쿠가와 세력 간의 복잡한 [[대립]]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의 영토 배분에서 도쿠가와 가문과 그 가신 [[다이묘]]들이 얻은 것은 일본 전국의 3분의 1뿐이었다. 나머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서군과 싸웠지만,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심을 가진 도요토미 가신 출신의 다이묘들이 가져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웃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홀라당 삼키고 50만 석이 넘는 대영주로 등극한 [[가토 기요마사]]다. 가토는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보호를 위해 힘쓰다 사망하고 사후 후손들은 영지가 [[가이에키|개역]]된다.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장 득을 많이 본 것은 이에야스긴 했지만 이 전투 자체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에도 막부를 열어서 실권을 쥐었다고는 하지만, 이에야스한테는 후견인 신분이여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해 따르던 히데요시의 가신들이었던 다이묘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충성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히데요리의 존재였다. 히데요리는 22살이 되면서 무럭무럭 장성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만큼 이에야스는 73살의 노령이 되었다.[* 도요토미 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222만석이었던 영지가 65만 석으로 줄었다고 하는데, 이에야스도 히데요리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점, 잃은 영지에 오사카 전투 전까지도 통치를 한 기록이 있다는 점 등으로 영지축소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히데요리가 어린 나이지만, 도요토미 가의 영향력 자체는 남아 있어서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다이묘들과 조정의 [[공가]]들도 매년 정월에 [[오사카 성]]을 방문하였다.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만일 자신이 여기서 이대로 죽는다면 다이묘들이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차기 [[쇼군]]으로서 따를 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고 히데타다는 인망이 매우 낮아서 도쿠가와 가문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보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보통 이런경우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도요토미 가문을 숙청하려하나 영리한 이에야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쇼군이 된 해에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면서 도요토미가를 안심시켰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오고쇼가 된 1605년이었다. 12살이 된 히데요리가 우대신[* [[오다 노부나가]]가 마지막으로 오른 관직이며 바로 전임 우대신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관위를 높여나가며 다시 관백과 태정대신 자리에 취임하여 아버지가 가진 권위를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관백의 자리는 공가인 [[쿠조]]가에게 돌아갔다. 실제로도 우대신으로도 만족 못했는지 요도도노가 태정대신 자리를 요구하자 도쿠가와도 "아니 오다 노부나가님도 천하를 재패하셨음에도 태정대신직조차 사양하고 우대신을 받으셨는데 히데요리가 태정대신? 관위가 유명무실이라지만 태정대신이 뉘집 똥개 이름인줄 아냐?" 라는 식으로 디스했다. 이후에 히데요리가 태정대신이 되지 못한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도쿠가와의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정으로부터 태정대신에 오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에 오르자 [[코다이인]]을 통해 신하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요도도노]]는 이를 거부했고 양자 간에 신경전이 계속된다. 1611년에 고미즈노오 덴노가 즉위하자 이에야스는 [[교토시|교토]]로 상경했고, [[니조 성]]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요청한다. 도요토미측에서는 역시 반대했지만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 등의 노력으로 회견은 이루어진다.[* 이 때 18살로 장성한데다 남들보다 체격이 컸던 히데요리를 보고 도요토미가를 멸할 결심을 했다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이전부터 쭉 계획해 왔을 것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척 했지만 뒤로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게 된다. 도요토미가 주변의 다이묘들을 압박해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공성을 위해 다수의 대형 [[철포]]를 제작하고[* 길이 2미터, 무게 20킬로의 대형 철포로 사정거리는 일반 철포의 3배가 넘는 300미터. 혼자서는 쏠 수 없고 3명이 달라붙어야 사격이 가능한 성안에서 다가오는 적을 저격하기 위한 방어용 철포였다.] 외국에서 대포와 화약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이때 [[조선]]의 대포를 참고하여 대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는 시도도 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이 [[화약]] 무기의 성능 면에서 우월한 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화약이라는 것 자체가 군사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서 원나라 시기에는 지도와 더불어 유출 금지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고려는 그나마 일본 정벌때 찔끔찔끔 들어올 수야 있었지만 일본은 그것도 안 되었다. 애초에 견당사 폐지 후 무로마치 막부 시절 감합 무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당시 일본군은 실제로는 일부가 조총으로 무장하고 대부분의 전투를 [[활]]이나 [[일본도]] 등의 [[냉병기]]를 쓴데 비해, 외려 조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대부분의 장병들을 조총으로 무장시키고 있는 등, 생각보다 화기로 무장한 정도가 낮았다.[* 그럼에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 조총병이 된 이유는 조선 상층부 외에는 조총에 대한 정보도 몰랐고 이로 인한 충격도 매우 큰 것도 있으나 일본보다 상국이라고 자처한 조선이 냉병기가 대다수인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는 것과 명이 참전할 때까지 크게 불리했다는 것을 최대한 합리화 하기 위함도 어느정도 있었기에 조총병의 존재를 매우 부각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대포는 죄다 [[포르투갈]]로부터 사들인 대포 몇 개를 제외하면 화포 제작기술이 전무한 일본이기에 자체 제작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에다가, 히데요시 지휘 하에 견고하게 만들어진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려면 효율적인 공성병기 대포가 필요했기에 대포제조 국산화에 열을 올리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해서 간신히 [[일본]] 기술자들이 대포를 만들어서 이에야스 앞에서 시연을 하게 됐는데, 그 대포의 구조가 너무 부실해서 포신 내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는 거다. 당시 이에야스는 드디어 [[일본]]의 화포 기술이 첫 발을 뗐다는 식으로 애써 포장하며 [[정신승리]]했지만, 이때의 처참한 실패와 더불어, 일본이 본래 섬나라라서 바다만 잘 막으면 외적 침입의 걱정도 할 필요없는데다, 이미 이에야스가 창립한 [[에도 막부]]가 천하를 통일하여 내부 정쟁에서도 대포를 더 활용할 필요가 없어진지라[* 공성전이 벌어지면 대포를 사용할 기회가 많은데 도쿠가와 가문이 집권한 이후로 일본에서 공성전이 벌어질 정도의 큰 전투는 [[시마바라의 난]]과 막부 말기 빼면 없다고 보면 좋다.] 그 후의 일본의 화포 제작 기술은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등이 [[의문사|차례로 죽어갔다.]] 가토의 경우 니조성에서의 회담 직후 죽었는데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숨기고 갔었고, 이 때문에 이에야스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에서도 이에야스가 독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도요토미가를 도울만한 다이묘들은 차례차례 죽어간 반면 세키가하라 이후 친이에야스파는 점차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멸문과 가이에키만큼은 막았던 [[우에스기]]와 [[모리]] 가문은 또 대들었다가는 진짜 끝장이어서 도쿠가와 가문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야 하는 불안정한 입장이였다. 이 외에도 나름 다이묘이자 도호쿠의 패자 [[다테]] 가문은 세키가하라 참전 조건으로 고쿠타카 백만석을 약조받았으나 전후 이에야스가 백만석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보상을 받아 불만은 많았지만 대세는 도쿠가와임을 알았기에 일단 살기 위해 도쿠가와에게 아부하였다. 나름 세력있는 다이묘인 [[마에다]] 가문은 이전에 도요토미 가문이 지켜주지 않는 바람에 이쪽도 멸문은 막기위해 친 도쿠가와로 갈아탔고 [[호소카와]]는 요도도노가 지휘하던 도요토미 가문이였기에 가망없다보고 이미 도쿠가와 가문에 붙었으며 [[시마즈]] 가문은 어차피 멀리 떨어진 규슈였기에 그냥 멀직이서 지켜보기만 한다. 대마도의 소 가문이야 워낙 깡촌이기도 하고 조선과의 외교 회복을 명분으로 이에야스가 살려뒀으니 더이상 도요토미가에 연관이 없었다. 이렇게 전국시대를 호령한 거대가문 우에스기/모리/다테처럼 이름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에게 깨갱거리거나 대들려고 하지 않으니 다른 다이묘들은 당연히 이에야스에게 맞서지 못했다. 이에 불안했던 히데요리도 조정의 관위를 막부에 하사했는데 무가와 공가의 벼슬을 아예 분리하려 했던 이에야스에게 거역한 것이었다.[*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무가제법도를 선포하며 이를 확고히 한다.] 도요토미 가는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논리였고, 이는 이에야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